처음으로 유리에 불을 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토치 앞에서 손이 덜덜 떨렸고, 눈앞의 투명한 막대는 금방이라도 내 실수를 비웃듯 휘어졌다. 나는 그때 유리가 이렇게 예민한 재료인 줄 몰랐다. 조금만 온도가 높아도, 각도가 어긋나도, 얘는 순식간에 말을 잃는다. 그래서일까. 유리랑 대화하려면 꽤 조용해져야 한다.
남서울대 환경조형학과에서 배운 건 단순히 재료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었다. 유리를 통해 시간을, 온도를, 감정을 읽는 법을 배웠다. 플레임 앞에 앉아 있으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다. 오직 지금,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유리는 딴청을 피우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학과 수업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유리 블로잉 같은 전통적인 공예 방식도 있었고,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공간 설치 수업도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재료 철학’이라는 세미나 수업이었다. 유리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빛을 품고 공간과 소통하는 존재라는 말.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 수업 이후로 나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자꾸 ‘말 없는 언어’를 고민하게 됐다. 누군가 내 작업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오래 머물러준다면, 그건 유리가 전하는 언어를 잠깐이라도 들었다는 뜻일 거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조형은 결국 ‘느낌’을 위한 매개체다. 정확한 해석보다, 느껴지는 게 더 중요하다.
졸업 전시 준비 중, 친구의 작품 설치를 도와주던 날이 떠오른다. 무거운 유리 패널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들고, 조명 각도를 조정하고, 벽면을 닦고, 그 작은 과정 하나하나가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금 이 공간에 정성을 드리고 있다는 느낌. 그 날은, 작품이 아니라 공간이 빛나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를 보면 전공 소개와 교수진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내가 그 설명을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환경조형’이란 말이,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걸 넘어서 삶을 구성하는 시선이자 태도라는 걸.
나는 아직 유리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가끔은 실수하고, 가끔은 너무 많이 깨뜨리고, 어떤 날은 아예 손도 대기 싫을 만큼 지칠 때도 있다. 하지만 유리는 그걸 탓하지 않는다. 어제 실수한 손길을 오늘 다시 받아준다. 그 느긋함에, 자꾸 마음이 풀린다.
이 학과에서 가장 많이 배운 건, 느리게 생각하는 법이다. 불안하거나 조급할수록 유리는 금이 간다. 삶도 그렇다. 지금은 유리처럼 살아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단단하고, 투명하고, 조금은 깨지기 쉬운. 하지만 분명히 빛을 통과시키는.